서로의 연고 되기_희음

관리자
202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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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unsplash


서로의 연고 되기


희음 활동가🌿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을 하면서 시, 에세이, 비평, 기록글을 써왔다. 

[멸종반란]과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활동을 2~3년간 함께하며 기후정의의 관점과 보편적 돌봄의 감각을 배웠다.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를 펴냈으며,  《김용균, 김용균들》, 《무르무르의 유령》, 《구두를 신고 불을 지폈다》를 함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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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이상한 생일이에요.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는 생일이니까요. 엊그제 밀란 쿤데라가 세상을 떠났고, 제 온라인 이웃들이 그의 죽음과 그의 글쓰기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들의 물결에 모르는 척 흘러들어가고 싶지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저도 그의 책을 많이 갖고 있고 한때 꽤나 읽기도 했지만, 그건 단지 그의 문체를 흡수하고 싶었거나 그를 이야기하는 이들의 세계에 편입되고 싶은 협소한 마음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요. 

그가 풀어낸 이야기와 사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그를 애도하려는 마음은 그의 이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요. 그의 책을 번역 출판한 출판사는 카드뉴스를 만들어 그가 지금껏 집필한 책들의 목록과 함께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를 빠르고 정확하고 아름답게 펼쳐 보여줍니다. 

그의 죽음은 기사에서, SNS에서, 카드뉴스 속에서 별세, 작고, 타계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명명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누구나가 아는 얼굴의 죽음, 너무 잘 상상되어서 그 얼굴과 삶이 마치 바로 눈앞에 둥둥 있는 것만 같은 죽음, 그리고 이 사회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고 떠난 명망 있는 한 인간 존재의 죽음은 늘 그렇게 불려왔으니까요.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도로써 많은 이들이 다시금 그의 문장들을 되새기고 그의 지적인 고집을 칭송하며 출판사의 안내를 따라 몇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동안, 다른 어느 후미진 영역에서는 셀 수 없는 죽음들이 새롭게 발생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셀 수 없는 게 아니라, 셀 필요가 없는 죽음, 세어서는 안 되는 죽음이라 해야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곳은 애도의 상상력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이곳과 저곳이라는 두 영역 사이에 놓인 분할선은 많은 이들의 마음 안에 그어진 분할선이기도 할 테죠. 공고해 보이는 그 분할선 덕분에 우리는 여러 죽음들을 잘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별세, 작고, 타계라는 이름의 죽음과 폐사, 살처분, 도축이라는 이름의 죽음으로.   

흔히 인간의 죽음에 있어서도 신원을 알 수 없거나 그와 혈연 및 가족관계에 있는 이를 찾을 수 없을 때, 그의 마지막은 애도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여겨져왔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별세, 작고, 타계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단지 ‘사망’입니다. 그리고 추가 설명이 따르죠. 무연고. 연고 없음. 어쩌면 공장식 축산업으로 죽임당하는 이들 또한 이 ‘연고 없음’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연고 없음은 이어진 관계가 없음을, 그를 잘 아는 이가 없음을, 그의 삶을 상상해보는 이조차 없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응, 난 몰라. 모르는 얼굴이야. 모르는 삶이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공장식 축산업은 끝없는 해일처럼 생명을 죽이고 생명을 뽑아내고, 죽이기 위해 다시 뽑아내기를 반복하는 일입니다. 죽음 자체를 낳는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이런 무섭고도 끔찍한 일이 어떻게 이다지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을까요. 생명들마저 이윤의 수단으로 쓰고 버리기를 되풀이하는 자본주의를 첫째 이유로 꼽아야겠지만, 연고 없음이라는 안전함 또한 이 흐름을 공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거예요. 연고 없음, 관계없음, 상관없음, 모르는 삶이라는 믿음의 안전장치. 이곳과 저곳, 인간의 삶과 비인간 동물의 삶을 나누는 평화로운 마음의 분할선. 물론 그중에는 어쩔 수 없이 떠밀리는 마음도 있을 겁니다. 그 같은 분할에 기대어야만, 이 동물 살육과 동물 취식을 당연시하는 거대한 문화적 믿음체계의 그물망 안에서 그나마 덜 불편하고 덜 위축되는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조금 불편하게 살 수는 없을지를요. 모르는 이들의 얼굴도, 그의 삶과 죽음도 함께 상상하고 아파하는 우리가 될 수는 없을까요? 또 내가 직접 만난 적 없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이만큼이나 극단적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해서 그의 삶과 나의 삶이 별개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지구라는 공동의 집과 지붕을 공유하고 있고 우리의 고통은 이어져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우리는 끝내 서로의 연고일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예수께서 자신이 지상에 사는 동안 직접 대면하고 접촉하고 한솥밥을 먹은 이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게 아닌 것처럼, 예수께서 뭍과 물과 하늘에서 살아가는, 얼굴 모르는 모든 생명을 위해 못 박히신 것처럼, 즉 예수께서 자신의 ‘연고’로 여겼던 그 모든 존재들을 위해 못 박히신 것처럼 그렇게 말이에요. 🌍 




이미지 출처 : 아이스톡 anna4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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