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긴 시간 속 한 점일 뿐인 내가
-강우근 시인, <공룡같은 슬픔> 읽기
윤은성
시인, 기후생태 활동가
좋아하는 공룡이 있으신가요?
저는 공룡에 관해 문외한이지만 떠오르는 공룡의 이름이 있습니다. '트리케라톱스(Triceratops)'라는, 초식 공룡으로 알려진 공룡의 이름이 제겐 어쩐 일인지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 공룡들이 나왔던 만화 영화에서, 육식 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가 그 세계관에서 최강자인 공룡이었어요. 육식 공룡들과 대비되는 초식 공룡의 세계도 있다는 걸 알고 몹시 다정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특히 코뿔소를 닮은 트리케라톱스는 생김새도 참 아름답게 보였어요. 얼굴에 돋아있는 뿔 세 개, 그리고 목 뒤로 드리워진 프릴까지, 물론 지금 시대에 복원해낸 형상이겠지만 신비로워 보이기도 했구요.
때때로 공룡 생각을 해봅니다. 그 육중했던 트리케라톱스가 풀을 뜯고,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취했을 몸짓들도요. 그 크고 강했던 생명체가 빠르게 사라진 후 긴 시간이 지나, 인간이 주류 종이 되어 지구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금, 인간도 언젠가 멸종에 이르고 말리라는 생각에 이르러보기도 합니다.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한편으로, 당장 눈앞에 닥쳐와 있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도 안일하게 해보게 되고요.
소개드리고 싶은 시는 강우근 시인의 시 <공룡같은 슬픔>입니다. 이 시를 읽다가, 특정한 동물종인 공룡이 현재 인간들에게 소비되는 방식을 잠시 떠올려볼 수 있었어요. 지구상에서 정말로 사라져버린 한 동물종이 지금에 와서는 인간에 의해 귀엽게 복원되고 다양한 캐릭터로 소비되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인간 역시도 먼 훗날 전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종에 의해 캐릭터화되어 기억될지도 모르겠네요.
공룡 같은 슬픔
강우근
다 똑같은 공룡은 아닐 것이다
오르니톨레스테스는 날아다니는 곤충을 사냥했다고 하지만
날개를 가진 곤충에 이름을 지어주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오르니톨레스테스도 있을 테니까
우리들 중 누군가도
영원히 인류에서 기억될지도 모르지
우리들의 목은 점점 뻣뻣해지고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아무도 모르는 행동을 해보자
주말의 아침에 깨어나
하품을 백 번쯤하고
열 가지 방식으로 귤을 까먹고
오지로 산책을 나서고
수액을 찾으러 나무에 오르는
개미와 뜻 없이 인사를 나누자
너무 크고 짐작이 가지 않은 것을
한눈에 보기 위해 지금도 누군가는 모형을 만들고 있지
우리가 만든 지구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동상이 온화한 미소를 견디고 있는 것처럼
몇 억년 전에 멸종된 공룡은
열대어가 사는 어항의 장식으로, 초등학생의 가방 고리로, 샐러리맨의 침실 쿠션으로 남겨져 있다
어디에나 공룡 같은 슬픔이 있다
강우근 시인의 이 시를 읽다보면 공룡의 생존시기부터 인간의 멸절 이후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지구상의 시간성을 느껴볼 수 있는데요. 그 긴 시간 안에선 한 점일 뿐인 인간인 내가,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타인을 위협하려는 마음도 단단히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억압적인 생각도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아집니다.
차라리 “개미와 뜻 없이 인사를 나누”는 등의 별 것 아닌 소소한 순간들을 일상에서 소중히 간직하며, 나만의 즐거운 일들을 기꺼이 즐겁게 행하고, 그 시간을 긍정하는 데에 마음을 쏟고싶어 집니다. 그래도 된다고, 단순한 위로가 아닌 큰 우주 속에서 발견되는 진실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으로 고요하게 선언하는 이 시로부터 작고도 큰 위안을 느껴봅니다.
그 긴 시간 속 한 점일 뿐인 내가
-강우근 시인, <공룡같은 슬픔> 읽기
윤은성
시인, 기후생태 활동가
좋아하는 공룡이 있으신가요?
저는 공룡에 관해 문외한이지만 떠오르는 공룡의 이름이 있습니다. '트리케라톱스(Triceratops)'라는, 초식 공룡으로 알려진 공룡의 이름이 제겐 어쩐 일인지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 공룡들이 나왔던 만화 영화에서, 육식 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가 그 세계관에서 최강자인 공룡이었어요. 육식 공룡들과 대비되는 초식 공룡의 세계도 있다는 걸 알고 몹시 다정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특히 코뿔소를 닮은 트리케라톱스는 생김새도 참 아름답게 보였어요. 얼굴에 돋아있는 뿔 세 개, 그리고 목 뒤로 드리워진 프릴까지, 물론 지금 시대에 복원해낸 형상이겠지만 신비로워 보이기도 했구요.
때때로 공룡 생각을 해봅니다. 그 육중했던 트리케라톱스가 풀을 뜯고,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취했을 몸짓들도요. 그 크고 강했던 생명체가 빠르게 사라진 후 긴 시간이 지나, 인간이 주류 종이 되어 지구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금, 인간도 언젠가 멸종에 이르고 말리라는 생각에 이르러보기도 합니다.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한편으로, 당장 눈앞에 닥쳐와 있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도 안일하게 해보게 되고요.
소개드리고 싶은 시는 강우근 시인의 시 <공룡같은 슬픔>입니다. 이 시를 읽다가, 특정한 동물종인 공룡이 현재 인간들에게 소비되는 방식을 잠시 떠올려볼 수 있었어요. 지구상에서 정말로 사라져버린 한 동물종이 지금에 와서는 인간에 의해 귀엽게 복원되고 다양한 캐릭터로 소비되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인간 역시도 먼 훗날 전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종에 의해 캐릭터화되어 기억될지도 모르겠네요.
강우근 시인의 이 시를 읽다보면 공룡의 생존시기부터 인간의 멸절 이후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아주 긴 지구상의 시간성을 느껴볼 수 있는데요. 그 긴 시간 안에선 한 점일 뿐인 인간인 내가,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타인을 위협하려는 마음도 단단히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억압적인 생각도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아집니다.
차라리 “개미와 뜻 없이 인사를 나누”는 등의 별 것 아닌 소소한 순간들을 일상에서 소중히 간직하며, 나만의 즐거운 일들을 기꺼이 즐겁게 행하고, 그 시간을 긍정하는 데에 마음을 쏟고싶어 집니다. 그래도 된다고, 단순한 위로가 아닌 큰 우주 속에서 발견되는 진실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으로 고요하게 선언하는 이 시로부터 작고도 큰 위안을 느껴봅니다.